달빛이라 허니... 정보
달빛이라 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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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에 가면, 드라마 '추노'의 촬영지였던 '운주사'가 있고
운주사에서 조금 더 가면, '중장터'라는 스님들이 모여 장을 열었다는 터가 있습니다.
불교가 대접 받지 못하던 시절
스님들이 장터에 가기 위해 '대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밤을 도와 산길로 산길로 '달빛'의 도움으로 몇날몇칠을 걸어 오고가고 했다고 합니다.
이웃 쌍계사에서는 녹차를 가져가서 다른 물건과 (물물)교환을 해 왔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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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터 유래
화순군과 나주군의 경계에 접해 있는 도암의 중장터는 화순, 나주를 막론하고 색다른 지명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나주 땅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능주고을에 속(屬) 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장터' 란 지명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고려와 조선를 통하여 스님들이 모여 매월 십오일에 경상도는 상주(尙州) 에서 전라도는 나주에서 물물교환의 시장을 이뤄 불가의 모든 물품을 필요에 따라 서로 바꾸어갔다.
전라도 나주고을에 매월 보름날이면 남자스님, 비구니, 반짝이는 머리들이 수백명씩 모였다.
허리 굽은 늙은중, 젖냄새 풍기는 어린 사미승, 머리가 메주 같은 중, 공산명월(空山明月) 의 둥근머리중, 뒷머리가 죽은 콩쪽머리중, 각양각색의 얼굴이나 쪽물을 들인 회색장삼에 윤기나는 민둥머리들은 모두 같아 일색이었으리라.
각각 자기 고장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가져왔는데 쌍계사(雙磎寺) 에서 온 스님들은 차(茶) 를 봉지에 담아 들고 서있고 화엄사(華嚴寺) 에서 온 스님들은 목탁(木鐸) 과 발우(鉢盂), 그리고 목기(木器) 를 가지고 왔으며 내장사(內藏寺) 에서 온 중들은 백지(白紙) 창호지, 딱지를 짊어지고 왔고, 대흥사(大興寺) 에서 온 중들은 유기(鍮器) 를, 무위사(無爲寺) 에서 온 중은 자기(磁器) 를, 송광사(松廣寺) 에서 온 중은 염주(念珠), 불상(佛床) 등을 가지고 모두 모여 중들끼리 필요한 물건을 서로 교환하였다고 한다.
나주가 지리적 여건으로 선문(禪門) 대찰들의 중간에 위치한 때문에 나주에 장터를 두었고 매월 십오일로 정한 것은 장거리를 도보로 걸어야 하기 때문에 달빛을 이용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러나 조선의 배불(排佛) 경향은 여기까지 미쳐 중들이 모이는 장날이며 나주, 영암, 등지의 건달들이 오뉴월 쉬파리 끌듯 장터에 모여들어 스님을 괴롭히고 물건을 약탈하는 등, 그 행패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숭유배불(崇儒排佛) 의 서러움을 실증하는 얘기라 하겠다.
할 수 없이 장터를 옮겼으나 궁벽(窮僻) 한 산골 도암 용강리(龍江里) 에 터를 닦아 장터를 만들었다.
호남지방의 여러 명찰에서 수백명의 스님들이 모여들어 물물교환하는 장소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보름날이면 일반사람도 함께 모여 궁벽한 산골에도 많은 곡식과 돈 꾸러미가 왕래하였다.
조선 중엽, 선승(禪僧) 으로 이름이 높았다는 운담(雲潭) 선사가 있었다.
이 스님이 전라도에까지 왔다가 승보대찰(僧寶大刹) 인 송광사에서 며칠간 쉬다가 돌아가는 길에 때마침 보름이 되어 중들이 모이는 이 장터에 찾아갔다.
목탁, 발우, 염주등 여러 물품들을 골고루 살펴보며 구경하다 돌아서는 길에 쌀을 팔고 사는 쌀장수들이 모여 서로 웅성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스님도 궁금하여 어깨너머로 살펴보니 오십세 정도 되는 쌀장수가 머리에 말(斗) 을 쓰고 땅에 엎드려 죽어 있었다.
운담선사는 사람들을 헤치며 들어가 보니 죽은 쌀장수의 등에 청문(靑文) 으로 방구월팔삼(方口月八三) 이라는 글씨가 또렷이 써져 있었다.
모두들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나 뜻을 전혀 몰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담선사는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어느 노인의 장죽을 빌려 죽은 사람의 등위의 글씨에 반드시 놓았다.
"읽어 보시오."
과연 담뱃대를 놓고 보니 방구월팔삼의 가운데에 전부한 획이 그어져 시중용소두(市中用小斗) 가 되었다.
뜻은 '시장 가운데서 적은 말을 썼다'는 뜻이다.
내용인즉 죽은 쌀장수가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여 남의 쌀을 사들일 때는 큰 말을 사용하고 소매(小賣) 하여 줄때는 적은 말을 썼으므로 백일청천(白日靑天) 에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운담선사는 설명하고 죽은 시체 앞에 합장배례를 한다음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고려 때에는 나주에 장터를 열었으나 조선에 와서는 벽지인 용강리를 장터로 정하여 조선 중엽까지 존속하였다 하나 그뒤 폐지되었다 한다.
그뒤부터 이곳을 중들이 장을 보았던 '터'라 하여 '중장터'라 불렀다.
이제는 푸른 산야로 변하여 중들이 장을 보았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궁벽한 산골에 이름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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