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중인 중국 한 가운데의 거대한 쥬신 유적들 > 십년전오늘

십년전오늘

10년전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은폐중인 중국 한 가운데의 거대한 쥬신 유적들 정보

은폐중인 중국 한 가운데의 거대한 쥬신 유적들

본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만주 피라미드 군
 

 

       한민족의 세계적인 유적 인 고인돌과 피라미드 유적

 

 

 

 


지금 우리국사가 이조를 기준으로 하고 있고, 현재 우리땅이 남한뿐이라 국보1호를 남대문이라

고 지정해놓았지만 원래 우리 한민족역사의 제1보물은 남대문이 아니라 남쪽지방의 세계최고

최다의 유적들인 고인돌입니다. 현재의 화교 국사에서는 중국 기록만을 믿고 존중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거의 모르고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입니다만  선사시대 유적인 세계 고인돌의 80%

가 우리 고유영토(한만주 포함)에 있습니다.

 

인류의 시원은 우리 황인종이고 황인종의 시원은 우리 한민족(동이족=활을 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유적들이 명백한 이상,동양인이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세계로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한국사학계가 세계 학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하는데 관료는 뇌

물만 밝히고, 사학계 학자라는 사람들은 중국사학자가 되어있다보니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외면하는 상황이라, 역사적 유적들이 수백점이 넘음에도 세계적으로 인 정

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적 유적이 바로 5천년~1만5천년전 유적인 고인돌(세계고인돌 80%

가 한만주와 한반도)이고, 다음피라미드(세계 피라미드 80%가 만주와시안) 입니다. 또하나!

세계 4대 피라미드의 주인인 들은 하나같이 백두산을 향해 머리를 두고 누워있다는 사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만주 피라미드 (집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인디언 피라미드 

 

 


 

주신,고조선이 신화인 이유가 단군이 마늘먹은 곰이 여자로 변한 사람을 데리고 나라(제국)를 건설하였다고

하기때문에 신화라고들 말 합니다. 곰이 어떻게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될수있냐고...

 

곰족, 호랑이족,말(갈)족...백제,몽고,왜족 신라족, 경상도족 전라도족, 사슴반, 호랑이반 이라고해서 곰이나 사슴,

또는 호랑이들을 말하거나 곰이나 사슴,또는 호랑이들이 사람처럼 행세하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민족을 부족별로 나누어불렀던 우리식의 표현이며 언어로써 중국식으로는 해석할수 없습니다.

 

 

이전의 중국황실이었던 청나라에 대해 지금의 중국정권이나 중국사람들인 진족들은 엄청난 역사적 스트레스(열

등의식)를 받습니다. 청나라의 아버지(태조)인 누런하치(=시라소니)는 함경북도 회령출신의 김 (金)씨임을 함북

출신사람들은 압니다. 단일민족인 우리 한민족은 다민족인 중국사회에 비해 성씨가 발달되어있지 않고 이름만

발달해왔습니다. 현재의 한국인들 성씨 대부분은 이조시대때 중국식으로 창씨계명되어온것인데 본래 우리민족

의 이름은 지금 성씨가 되어있는 금金씨입니다. 

 

우리선조님들께서는 금자를 사랑하여 사람性자로도 쓰고, 나라國이름으로도 쓰고, 주음식(김치)에도 써오고 있

슴이 이를 증명합니다. 금이란 최강,최고가치를 뜻합니다. (단군의 본명은 금산 -연사-)

 

 

동북공정이 왜 북한(남한)까지를 포함하냐면 만주족이 고구려족이고 고구려족은 바로 우리 한민족(조선족=고려

인)이었슴을 진인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청나라(청제국)는 중국을 정복한 후에 백두산을 신성시하여 경비병을

두었다는 사실은 청(연)사에 기록되어있는 내용입니다. 자신들을 " 백두민족" 이라고 했지요.

 

백두민족이란 백두산이 우리민족의 발원지 즉, 영산으로써 고구려말로는 높구려 즉, 백두산이므로(구려란 : ~을

존중하는 의미를 할때 붙이는 원래 우리말로써 높을고高자는 있는데 구려란 중국말은 없으므로 중국인들은 대충

만든바, 글귀구句자, 마을 려麗를 써서 고高씨의 마을이다 라는 뜻의 고구려高句麗라 씀, 요즘은 고씨가 원래 중국

고씨가 원조라고 조작하며 고구려는 중국변방국이라고 잘도 꾸며대는데 우리 후손대에가서는 금金씨도 원래 중국

금씨였다고 조작하며 우겨댈것이니 한국사람들은 지금의 단군신화처럼 속지 말아야 함. 고구려란 백두산민족이란 

존중하는 의미의 존중,높임말인데, 오늘날 "구리다(나쁜냄새난다 "에이 구려~ " )식의 나쁜의미의 단어로 방구냄새

나 똥 냄새를 표현하고있고  또는 "싸구려(저질품)~ 을 표현할때쓰는 단어로 전락되었슴은, 언어를 통해서도 구려

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 키려는 오래전부터의 치밀한 동북공정의 공작에  일환임을 알아야 합니다.(한민족 말살

공작)

 

 

연개소문이라는 고구려시대의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는데, 가문본명은 金海, 호인 연개소문이란 이름자중 성씨인

연씨는 백두산 천지연을 뜻합니다. 즉 백두산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도랑가 연못의 연이

라고 왜곡해놓았고, 중국서에는 심지어 천씨라고까지 남의 성씨마저도 지들 멋대로 바꾸어 기록해 놓았는바 ,이게

바로 중국역사기록의 진실입니다. 이러한 중국기록만을 한국 사학자들은 무조건 신봉하고 있는 바, 이미 반화교화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춘추필범이란 수법처럼 우리민족의 참된 역사적사실이 이런식으로 중요한 각 부분에서 

마구 조작된 사실을 아는사람은 현재 대학이건 고구려연구회이건간에 한국사학계내에는 거의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일만년 동안 흰 머리산을 신성시 해 왔다.

 

원래 백두산은 지금보다 3분의 1 정도가 더 높았고 맨 윗부분에는 만년설이 있었으며 중국대

륙에서 보였으며 역대 칸들은 모두 백두산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잤다. (청연사)

 

 

우리민족이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이유는, 우리민족의 "발원지로써 혼의 산"이기 때문입니다.

백두민족이란 우리 한민족을 부르는 이름인 부름입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정신이며 우리민족

정체이며 상식입니다. 한민족은 누구나, 백두산천지를 가면 신성한 영혼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화교들은 그 신성함을 두려워하여 백두산 괴물설을 조작해내기도 하였는바 이것은 또

다른 한민족말살 공작인 동북공정입니다. 이것이 한민족과 화교의 '유전자적 현상' 입니다.

 

 

몽고제국의 황실은 주신-고구려때부터 구전(말로전해오는 역사)으로 알고있는바,고려에 대해 

원래 "우리는 역사적으로 원래 형제지간임"을 사전에 칸의 친서를 직접보내 통보하여 이를 분명

히했고 최초의 려몽연합작전인 거란군을 토벌당시부터 칸의 명에의해 '형제'를 갖추어 대

했으며 삼별초의 저항을 제압한후에도 직접통치하지 않고, 민족전통에 따라 독립을 유지시켰으

며 형제국(부마제국)으로써 주신 전통을 지켜 황족의 딸을 서로혼 인시켜 상호 칸비로 간택케하

였던 사실은 주신시대때부터 고구려시대까지 전해져온 민족적 전통관습이었습니다.

 

                        

 

 

        중국땅 원래 우리 땅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장개석을 방문한 이시영 임정 요인에게

                 장개석은 이렇게 말 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중국 대륙이 원래 당신들 영토 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무슨 말씀 이신지..?

 

     "독립운동도 좋지만 당신들 참역사를 먼저 알아야지...참역사를 모르는 독립운동은

      진정한 독립운동이 안되지 않겠나..? "       혹시 고구려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 중국역사 자체가 원래, 당신들 역사이었다니까.."

                                                                                 

                                                                                  예 ?  그것이 사실입니까?

 

 

                                                                  -  이시영박사 일기 -

 

 

상해임시정부에서 남한으로 돌아온 이시영박사는 후일 또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장개석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시 상당히 충격적이라 무슨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은 장개석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고대사가 동이족의 역

사임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박사의 증언 -

           

 

 

 

 

   여러분! 중국 이란 나라이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바둑으로 말하자면 그냥 '가운뎃 집' 이라는 뜻이죠. 바둑에서 집을 가운데부터 짖지 않습니다.

     사각의 귀퉁이부터 집 짖기시작하여 가운데 집을 짖게되죠. 이것은 세상의 순리이며 이치입니

     다. 중국인들 스스로가 다민족이라고 하죠? 지금 중국인들 80%가 한민족의 유전적 특징인 청

     반점이 있습니다. 순수화교만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화교정권은 대략 100년이고 우리 한

     민족의정권의 통치기간은 보통 200년이죠. 동북공정을 안할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지금의 중국은,고려후손인 청제국의 200년 통치기간중 정복된 영역이지 

화교들이 만든 영역이 아니며, 화교의 고유영역은 송나라 지역일뿐이다.

 

 

 

 그 엄연한 증거들...

 

 

     은폐중인 중국 한 가운데의 거대한 주신 유적들

 

 

 

 

중국,최초의 통일왕조였던 진나라 시황은 한국인(동이족) 이었슴을 중국학자들은 안다.

 

중국공산당 당국은 진시황의 릉을 발굴한 이후,  현재까지 방치해놓고 있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아십니까? 발굴유적 중, 병마용갱을  보신분은 아시겠지만 진시황을 비롯해 대다수의 병사들

은 모두 상투를 하고 있습니다.  상투는 한민족 고유의 두발형태입니다. 이것은 변발형태인데

위로 올리면 상투가 되고 아래로 늘어트리면 변발이 되는것입니다. 우리 한민족만의 고유 두발

형태로써 주신, 구려, 몽고, 만주, 왜 까지 이어진 전통 두발풍습입니다.

 

중국에서 발견된 엄청난 규모의  진시황의 유적, 자세히 고증해보니 동이족 즉, 한국인조상들이

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시안의 피라미드와 같이 발굴중단해놓고 있습니다만  독일 고고학자들

이 왜 귀중한 유적인데 발굴을 하지 않고 저렇게 그냥 놔두느냐고 묻자, 유적이 훼손될까봐 발굴

중단했다고 공식 답변한바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화교스런, 동북공정식 답변입니다. 요즘의 유

적 보존 과학기술이 매우 발달해있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얘기입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거죠.

 

진시황 분서갱유동북공정식의 중국역사를 모조리 불살랐던 것 입니다.

 

 

 

 

 

 

 

     은폐중인 중국의 거대한 피라미드 군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인 중국 시안의 제2단군릉(구글 위성)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인류최고,세계최대의 주 신 문화유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안 단군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진시황 유적이 아니라 제2 단군릉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신의 서울(평양)이었던 시안(장안)

                     

 

  이 내용은 삼우선생이 중국을 방문했을때 만난 중국인으로부터 녹취 된 내용입니다.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조사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으로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 세계 최대의 이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이죠, 우리는 중국최고의 이 엄청난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

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제일 큰것이 역시  대단했어요.거대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

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

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

니다.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

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 세계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 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

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

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

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조사를 모두 중단하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조사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

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장문구(張汶邱 가명)씨의 임종 전 증언 내용-

                                                                            (녹취문서 보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 당국은 그토록 은폐해왔던  북중국 피라미드가 서구의 고고학계를 통해 알려진 이후에 

과거 주은래총리가 반대한 동북공정을 더욱, 대대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

만한 독, 미, 중, 일, 러등의 외국역사학자들은 모두 알고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만,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인 대학교수와 언론만 모르고있는바, 이건 등잔불밑이

어두운게 아니라 등잔에 불이 없는 장님의 상태로써.한국사학계의 장님현실을 단

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땅을 치고 크게 울다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중국공산당 당국에 공개 요청한다.

 

 우리 한사회원인 모 방송 기자가 중공당국에 3년째 서안피라미드 지역에 대한 촬영취재요

청서를 중공외교부에 제출하고있지만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더구나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인데도 유네스코에 등재하지 않고있어요. 그러면서 중국역대왕릉이라고 모조품과

자작한 비석들을 세워놓고 그 안에 있던 유적만 쬐끔 전시하는 애들 장난질 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한사 회원중 한명이 시안의 피라미드지역을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조사받고 각서

를 쓰고 풀려났다. 왜 이러는가? 그 좋은 위대한 유적을 유네스코에도 등록하고 세계에 공개

해야 마땅하지 왜 군대를 그 지역에 주둔시켜 일반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는가? 왜 그

래야만 하는 거냐? 이 짱깨 화교놈들아 !

 

현재의 중국은 우리 남북한과 동시에 좋은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특히 북한에 대하여 형제국

임을 강조하며 북핵 6자회담등,외교에 있어서도 특별한 우호를 강조, 실행 ,홍보하고 있는바, 

최근에는 한반도 평화 자주통일을 적극 지지한다는 공식입장을 외교적으로 천명 한 바 있

다. 우리 한민족참역사는 이를 환영하면서 보다 발전된 양국의 밝은 미래와 공동발전을 위해

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는 바이다.

 

후세의 세계역사가들에게 비판받을 가증스런 역사조작인  동북공정을 즉각 중단하라 ! 

또한, 과거 주신과 구려 강역으로써 현재진행중인 발해유적과 발굴중단된 북중국

의 피라미드 고분들에 대한 공동 발굴 작업을 수용 하라!


한 민 족 참 역 사

  

 

 

 

이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한민족 참역사 카페지기 에게 있습니다.

 

 

 

 

 

 

          .khankorea,

 

 

 

 참고: 대문글은 우리 한민족참역사의 원래 주된 내용을 정리한것으로 현재의 대문글에 비해 약 3배가 많은

내용입니다만  그러다보니 용량이 너무커서 용량이 적은 컴터를 갖고계신 회원들의 경우 대문글전체가 잘

보이지 않는등 버벅현상이 있는 문제로 옆 메뉴창 상단에 원래 대문글 게시판을 따로 만들어서 그 내용을 이

동시켜 놓았으니 신입회원들께서는 기존의 이 대문글들을 모두 읽어보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국 원주민 치앙타이(한국인 후손)들의 전통 주거지 초가집 전경

 

 

 여기 가셔서 우리 한민족후예들인 잉카의 음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072765

 

잉카(INCA)문명

img_1416735_14944_28?1206520212.jpg

마야 문명만큼 신비스럽고 미스터리한 문명이 잉카문명이다. 잉카문명은 태양 숭배와 황금으로 유명하다. 잉카문명에 대한 연구는 잉카족이 어딘가 숨겨놓았으리라 전해지는 전설적인 황금도시 두 곳(엘도라도와 파이치치)를 중심으로 한 발굴을 통해 더 깊이 진행되었다. 잉카인의 도로 관리, 지방 관리 시스템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것과 비교과 되며 연구 대상이다.

잉카문명을 건설한 잉카족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13세기 경 만코카팍이라는 전설적 인물이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남페루고원의 쿠스코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태양의 신전을 축조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잉카족은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카족 같이 케추아 언어를 사용하는 페루 인디언의 한 집단이었으며 그 당시 대부족이었던 창카족과의 대전쟁에서 이겨 중부 페루고원까지 손에 넣었다. 이후 각지방의 도로가 정비되고 고원의 깊은 골짜기에도 다리가 놓여 유명한 잉카 왕도(王道)의 도로망이 완성되었다.

img_1416735_14944_19?1206520212.jpg

창카족과의 대전쟁과 이기고 이러한 업적을 남긴 파차쿠티왕은 1474년경에 죽었다고 알려진다. 다음의 투파크 잉카 유팡퀴 황제의 시대에도 정복사업은 속행되어, 에콰도르  지방과 칠레 아르헨티나의 북부도 잉카의 영토가 되었다. 질서가 확립된 행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각종 공공건축도, 태양신전과 성채를 중심으로 각지에 세워졌다. 잉카제국의  근본적인 형태는 이 투파크 잉카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이 잉카가 죽은 것은 1493년경이었다



잉카는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지방(페루·볼리비아)을 지배한 고대제국의 명칭으로 동시에 그 사회적 중핵(中核)으로 되었던 부족 및 그 지배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잉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잉카족은 케추아족이라고도 불리며,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카족 등과 함께 페루 인디오의 한 집단이었다.

img_1416735_14944_18?1206520212.jpg

잉카는 네개의 "수유" (suyu)로 나뉘어 각 수유의 모서리는 (잉카 신화에 의하면) "세계의 배꼽" (Qusqu)에 서로 맞닿아 이곳에 수도 쿠스코가 설립되었다.

제국의 공식 언어는 케추아어였으나 몇 백개가 넘는 지역 언어가 통용되었다. 잉카 지도부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도록 권장했는데 그 중 최고신은 태양신 인티였다


img_1416735_14944_15?1206520212.jpg

기원전 11000년 오늘날 페루라는 불리는 지역에 정착해 기원전 1250년 안데스 산맥지역에 부족사회가 형성된다. 빈족, 치무족, 나스카족, 티아우아나코족 등이 있다. 서기 600년 우아리 지역에서 온 민족이 200여년 동안 서부 안데스를 지배한다. 이때부터 미라를 매장하는 풍습이 생긴다. 900년 우아리 민족이 사라지고 다시 여러 부족으로 갈라진뒤 1105년 잉카 군주인 신치 로카가 자신의 부족을 다스리게 된다. 1370년 치무족이 페루를 다스린다. 1438년 부족들끼리 분쟁을 일어난다. 약 50년에 걸쳐 잉카족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img_1416735_14944_12?1206520212.jpg

1100년 잉카인들이 세력을 넓히려고 다른 민족을 정복한다. 1438년 창카족이 잉카인을 공격하나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잉카제국이 내분이 일게 된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우연히 아메리카대륙에 오게 되어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정복하게 된다.

1430 - 1532년에 전성기를 이룬 제국이다. 꾸스꼬를 기반으로 작은 왕국이었던 잉카는 1세기만에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부의 모든 왕국을 통일흡수하였으나 삐사로에게 제왕이 체포되자 쉽게 멸망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부터 여러 문명이 명멸하였다. 잉카는 그 최후에 나타난 제국으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아 역사를 추정할 수 밖에 없다.


img_1416735_14944_17?1206520212.jpg

태양의 신인 비라꼬차의 계시에 따라 최초의 잉카선조들은 기원후 1200년경에 있던 전설상의 대홍수에 의해 이주했다. 이후 망꼬 까빡이라는 최고지도자의 금지팡이가 가장 깊이 박히는 곳에 도읍을 정하라는 계시가 있었고 결국 세상의 배꼽이라는 지금의 꾸스꼬에 신의 계시에 따라 도읍을 정했다. 그들의 수도인 꾸스꼬는 인구가 이십만정도되는 큰도시였다.

img_1416735_14944_13?1206520212.jpg


네 개의 세상전설을 가진 문명은 씨족공동체인 아이유(Ayllu)를 통해 제국이전부터 토지, 가축 곡식 등을 공동소유하여 집단생활을 했다. 사회제도 행정의 기본틀이 된셈이다. 께추아어를 사용했지만 문자는 없었다. 끼뿌(께추아어로 매듭을 뜻하며 매듭져있는 일련의 끈 또는 줄의 다발로서 수를 계산하고 역사 사건을 기록하는데 사용)를 중심으로 자치적인 정치운영을 했다.


img_1416735_14944_2?1206520212.gif

피사로의 세 번째 탐험 때 분열이 일어났다. 그 이전 원정때 잉카제국에 천연두를 만연시켰고 그로인해 그들의 황제 위아이나까빡이 죽자 왕위계승정쟁이 벌어져 잉카제국이 둘로 갈라진다. 형인 우아스까르는 꾸스꼬의 잉까 (원래른 고대문명을 세운 가문의 성인데 황제란 의미로도 쓰인다.)가 되고, 동생인 아타우알판는 키토의 잉까가 되었다, 우아스까르가 아타우알파 추종세력에 의해 암살되었으며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를 빌미로 아타우알파도 처형하여 결국 1533년 삐사로는 쿠스코를 최종적으로 점령 1535년 항구도시 리마를 건설했다. 즉,
  • 복사

댓글 전체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퍼왔습니다. 좀 길지요  ^^

북한에 있는 단군능과 장수왕능이 중국 서안에 피라미드, 이집트 피라미드, 마야 피라미드, 일본 오끼나와 바다속 피라미드, 인디언 피라미드가 모두 같은 형태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 일까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내용 같습니다.

 이 내용을 특정 종교가 자신들의 교세확장을 위해 이용해서 좀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번 연구해 봐야 할 내용 같습니다. 중국은 왜 피라미드들을 공개하지 않는지도 궁금하구요.
흠...저도 어렴풋이 우리사학계가 친일파의 어용집단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갖습니다...

많은전문가들이 좀 연구해서 여러가지를 밝혀주었으면 합니다...
글쎄요.
시각을 좀 달리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일본놈들은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대한민국이 자신의 땅이라고,
우리를 포함하여 국제사회에서도 별 쌩 지-랄을 합니다.
잘못된 사고로 똘똘 뭉치고 실질적으로도 문제를 자주 일으키지요.
그러나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시하는 것 자체로,
큰 소리를 칠 수 있고 그 이상의 실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일본의 현실이기 때문이지요.

일본놈들도 역사(사실에 근거한 과거의 기록이자 현재상의 반영)를 쌩 까고 있는데,
중국의 개 놈들도 지-랄 쌩 까고 자빠졌는데,
우리라고 못 할 바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그것이 어떠한 종교적 측면의 접근이 아니라,
철판 깔고 국가적 차원에서 밀어 붙여야 할 일이 아닌가 봅니다.
(단, 이왕 하고자 한다면...)
© SIRSOFT
현재 페이지 제일 처음으로